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5월11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by 나홀로산다 2023. 5. 11.

동학동민혁명은 1894년 3월, 봉건체제의 개혁을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중심의 혁명입니다.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항쟁, 3·1 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민중운동의 근간이 되었으며 을미의병 활동, 3·1 운동,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모태로서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의 지평을 연 근대 민족사의 대사건입니다.

고부농민봉기

1894년 1월 10일, 전봉준(全琫準) , 김도삼(金道三) , 정익서(鄭益瑞) 등의 주도로 고부 농민들이 봉기하여 탐관오리로서 온갖 폭정을 저지른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을 몰아냈습니다.

무장봉기

고부농민봉기를 수습하고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李容泰)의 가혹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여 무장(茂長)으로 피신하였다가 그 해 3월 20일 전면적으로 봉기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은 포고문을 발표하고 고부로 진격하여 다시 점령하였으며, 진영을 확대 개편했습니다.

또한 호남창의대장소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여 민중들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하였고, 4대 명의와 12개 조 기율을 발표하여 군율을 정했습니다.

이후 전라감영 군을 격파하고 전라도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을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4월 27일에는 호남의 수부(首府)인 전주성을 점령하고, 5월 8일 전주화약을 체결했으며 이 전주화약을 계기로 동학농민군들은 자기들의 고을로 돌아가 폐정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전주화약을 맺은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했습니다.

우금치 전투

전국 각지에서 반침략항쟁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 많은 동학농민군이 봉기했습니다.

서울로부터 내려온 관군과 일본군은 공주 우금치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했고 이곳에서 두 차례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열망은 강했으나 절대적인 무기의 열세로 동학농민군은 패배하고 말았는데요. 이후 지도자들 또한 대부분 체포되었습니다. ​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후 봉기의 대열에 참가했던 지도자들과 민중들은 지방 유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보군과 관군, 그리고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농민군 5천여 명이 주둔하여 치열하게 싸웠던 고성산은 고승당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죽은 원혼이 "고시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당시 토벌된 농민군의 수가 수천을 넘어섰고 인근 마을에서 수십 집이 10월 13일 한날 밤에 제사를 지내왔다고 합니다.

천도교 주관으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인 1994년 동학혁명군위령탑을 건립하였고, 매년 위령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